[연재기고]
빅데이터로 본 젠더 이슈
‘파랑’ 크레용을 위하여 ;
나다움을 인정하는 데이터
최정호
빅데이터 혁신공유대학 사업단 / 법학박사
마이클 홀의 그림동화 <빨강>에는 ‘빨강’이라는 이름의 크레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빨강’은 빨간 딸기를 비롯하여 빨간색이 들어간 것을 그리는 데에 애를 먹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빨강’이 더러 노력을 더 해야 한다거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해주기도 했고, 부러지거나 포장지가 너무 꼭 낀다거나 너무 뭉툭해서 그런 거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두’의 부탁으로 파란 바다를 그렸는데 너무나 예쁜 바다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빨강’이는 이름과 달리 파란색이었기 때문이에요. 파란색인 ‘빨강’이는 파란색으로 인정받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제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젠더’ 역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이번 ‘빅데이터와 젠더’ 시리즈의 많은 이야기는 마치 젠더 구분이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영역으로만 구분인 것처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젠더는 둘로만 나뉘지 않아요. 이 점은 지난 호에서 젠더 폭력이 젠더 불평등을 기반으로 성소수자도 관련된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살짝 암시되었지요.
태어났을 때 ‘빨강’이라고 지정되었지만 실은 ‘파랑’이었던 동화 <빨강>의 주인공처럼, 의학적으로 지정된 성별과 스스로의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둘이 일치하는 것을 시스젠더라고 부르고, 일치하지 않는 것을 트랜스젠더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젠더 정체성은 여성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논바이너리’, 즉 에이젠더, 젠더 익스팬시브, 젠더 플루이드, 젠더퀴어, 두 영혼 등으로 매우 다양합니다. 때로는 시스젠더를 ‘정상성’으로 받아들이며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스젠더도 젠더 스팩트럼 중 하나일 뿐이에요. 이것은 마치 하나인 줄 알았던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무지갯빛으로 나타나는 것과도 같아요.
여기에서 우리는 데이터의 다양성이나 정치성을 떠올려볼 수 있을 거예요. 이미 이 시리즈의 첫 회에서 언급한 ‘젠더 데이터 공백’과 같은 개념이 보여주듯이, 데이터는 가치 중립적인 숫자가 아니며 오히려 정치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문조사 문항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성별’이 ‘남성’만 있다면, 여성에 대한 데이터는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날 표면적으로나마 성평등이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같은 상황에서 오직 ‘여성’과 ‘남성’으로만 구분된 문항이 주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이때 트랜스젠더는 시스젠더 여성 및 남성과는 달리 고민에 빠지게 될 겁니다. 이것은 존중받지 못했다는 뜻이고, 만약 정책 판단의 기반이 되는 조사에서 그랬다면 특정 성적 정체성을 정책적으로 배제하는 문제로 이어지기까지 합니다.
이쯤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실시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며 성소수자로서 트랜스젠더가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설문에 응한 트랜스젠더 591명 중 65.3%(384명)가 응답일 기준 12개월 동안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표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런 취약함은 자신을 드러내며 겪는 어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분증에 표기된 성별과 외모 등이 일치하지 않아 병원 등 의료기관 이용 포기(21.5%), 투표 참여 포기(10.5%), 보험 가입 포기(15.0%)나 은행 이용 상담 포기(14.3%) 등의 어려움을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표] 신분증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하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봐 일상적 용무를 포기한 경험 (출처: 국가인권위원회,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2020)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인권상황 개선을 위하여 중앙행정기관 및 통계작성지정기관의 국가승인통계조사와 각 기관의 실태조사에서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파악하여 정책 수립 등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국가정책에서 정보와 통계 자료가 없다면 해당 분야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워 중요성에 비해 과소평가 되거나 그 분야에 대한 정책 자원 배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에도 세심한 접근이 필요해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고려하면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의 정보를 어떻게 질문하고 수집할지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니까요. 지정성별, 젠더 항목,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등을 포함해 조사하고 있는 캐나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등의 사례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며 인권침해의 소지를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매년 3월 31일은 국제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에요. 이날은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관련 의제들을 가시화하기 위한 국제적 기념일이지요. 이는 곧 트랜스젠더가 사회에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동화로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빨강’이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떨까요? 내가 파랑인데 자꾸 빨강이 되라고 하며, 이를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 또는 뭉뚝한 정도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나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자두’는 ‘빨강’이 파란 바다를 멋들어지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고, 그의 파란색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LGBTQ+와 같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이들을 ‘앨라이’라고 부릅니다. ‘자두’는 ‘빨강’의 앨라이였습니다.
그림 출처: 국제앰테스티 홈페이지
아마 여러분도 빅데이터가 다양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로부터 누구도 배제하지 않기 위한 함의를 이끌어내어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빅데이터는 성소수자의 앨라이면 좋겠습니다. 빅데이터가 퀴어해질 때, 성소수자가 우리 주변이 이미 있음에도 누군가에 의해 없는 존재처럼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고, 편견에 맞설 동력을 얻을 것이며, 앞선 인권위 조사 결과에서처럼 당연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성소수자 역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빅데이터가 공적 영역인 정책에서 그리고 사적 부문인 시민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올바름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번 ‘빅데이터와 젠더’ 시리즈는 사법 영역에서 올바름을 말해야 하는 주체로서 서울고등법원이 ‘빨강’이를 지지한 최근 판결의 한 구절과 함께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
- 서울고법 2023. 2. 21. 2022누32797 판결 중